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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목 요리를 아십니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5115 작성일 : 2010-06-08
오리 목 요리를 아십니까?
중국의 오리목 요리 전문점 CEO의 기막힌 성공 스토리
 
주간무역
 
한국인과 중국인이 나란히 로토 1등에 당첨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한국 사람은 아래위로 한 벌 쫙 빼입는 반면 중국인은 평소 못 먹던 음식부터 찾는다는 것이다. 한국이 ‘의-식-주’의 순서라면 중국은 ‘식-의-주’쯤 된다.

실제 ‘요리의 천국’ 중국에는 음식점이 지천이며 다른 곳에선 구경할 수 없는 온갖 요리가 다 있다. 이런 중국에서 ‘오리 목 요리’라는 별난 아이템으로 마흔 남짓 나이에 성공을 거머쥔 인물이 있다. 지우지우야 야징왕(久久□鴨頸王)'의 구칭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구칭 회장은 한마디로 중국 요식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이다. 오리 목 요리라니 께름칙한 것 같지만 중국에선 그 유명한 ‘베이징 덕’에 버금갈 정도로 누구나 즐기는 음식이 됐다.

‘지우지우야 야징왕’이란 브랜드도 독특하다. 우리 귀에는 다소 어렵게 들리지만 중국에선 상당히 잘한 작명이라는 평가다. ‘지우지우(久久)’는 ‘(오리 목이) 길다’는 뜻과 ‘(장사가) 오래도록 잘 된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야징왕(鴨頸王)’은 ‘오리 목 요리의 왕’이란 말인데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왕갈비’, ‘왕곱창’ 같은 조어법이다.

구 회장은 1968년 중국 동부 연해지역인 장쑤성 출신으로 1992년 상하이 퉁지대학을 졸업하고 유명 식음료업체인 러바이스에 입사했는데 회사방침에 따라 입사하자마자 생산라인에 배치됐고 많은 동료 직원들이 불만과 짜증을 쏟아냈지만 그는 성실하게 근무에 임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의 눈에 띄었고 사장은 그를 비서로 전격 발탁했다.
그리고 다시 기회가 왔다. 평소 그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을 지켜보던 사장이 그를 후베이성 우한 지사장에 임명한 것. 입사 1년 만에 전략시장 중 하나인 우한의 책임자가 된 것은 파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구 회장은 사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한지사는 구칭이 부임할 당시 매출실적이 거의 없었으나 2000년에 이르러서는 연간 1억 위안을 올리는 모범 지사로 급성장했다.

우한 지사장 때의 일이다. 우한 시장통에는 유난히 오리 목 요릿집이 많았는데 한번 먹어본 후 그 맛에 반한 구칭은 본사 출장이 있을 때마다 그걸 잔뜩 사들고 와 직원들과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중국인들은 보통 출생지에 따라 입맛이 제각각이기 마련인데 오리 목 요리는 남방, 북방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먹는 모습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구 회장은 그즈음 창업을 결심했다. 비록 오리 목이지만 시장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오리 목 요리점은 우한 이외에 다른 곳에도 있었지만 대부분 영세한 단일점포여서 체인점으로 하면 대박이 날 것도 같았다.

결국 구칭은 2003년 50만 위안의 자금으로 회사를 차렸지만 가공공장 차리는데 40만 위안을 쓰고 점포임대, 인테리어에 재료와 양념, 자재를 사고 나니 수중에 남는 돈이라곤 없었다. 빠듯한 자금에 점포 입지가 좋을 리 없었고 결국 임대료가 싼 재래시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구 회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낙관했다. 부지런히 만들어 팔면 운영이 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창업자금을 빨리 뽑을 생각에 한 근에 25위안에 팔았는데 손님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만 것이다. 주부들이 인근 고깃집에서 8.5위안이면 생오리 목을 사서 집에서 요리해먹을 수 있는데 몇 배나 비싼 구칭의 가게를 찾을 리 만무했다.

매출이 없으니 가공공장은 계속 휴업상태였고 극심한 경영난에 몰린 구칭은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러바이스 사장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구칭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러바이스 사장은 50만 위안을 선뜻 내주면서 똑똑하긴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구칭을 위해 작은 점포나마 운영 컨설팅도 해주었다.

구칭은 50만 위안을 갖고 재기에 나섰다. 새벽 6시 전에 점포에 나가 그 날 하루를 계획하고 구매, 배송, 판매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귀가시간은 평균 새벽 1시 이후였고 바쁠 땐 하루 2~3시간만 잤다.

당연히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불면증에 탈모, 허리와 목의 통증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졌고 한번은 화물차를 주차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해 위기를 넘겼다.

이런 강행군 속에서 영업이 점차 정상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값을 적당한 수준으로 내리고 다양한 판촉행사를 벌이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매출이 오르는 것과 비례해 체인점 개설문의가 봇물을 이루었다.

드디어 통쾌한 결승골 같은 ‘월드컵 마케팅’이 작렬했다. 오리 목 요리는 매운 맛이 특징이어서 손님들은 시원한 음료를 곁들여야 했다. 이 가운데 찰떡궁합은 맥주여서 직영점은 물론 체인점도 슈퍼에서 대량으로 맥주를 구입해서 함께 팔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6년 독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의 대표적인 맥주인 칭다오맥주가 4000만 위안을 들여 중앙TV의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을 협찬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때 구 회장은 더 이상 슈퍼에서 맥주를 사다 팔 것이 아니라 칭다오맥주로부터 직접 물량을 공급받아 오리 목 요리와 함께 파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세계적인 브랜드인 칭다오맥주와 오리 목 요리를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전략이었다.

이때부터 전국의 체인점은 월드컵 마케팅 모드로 일제히 전환했다. “월드컵은 ‘지우지우야’와 함께”라는 플래카드를 매장 곳곳에 내걸고 인테리어도 월드컵 테마로 새롭게 꾸몄다. 배달용 포장에는 월드컵 경기일정표를 새겼고 24시간 영업으로 축구팬들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월드컵이 열린 2006년에만 24시간 영업점포를 300개나 추가 개설하고 하루 평균 30톤의 오리목 요리를 팔 수 있었다.

구칭 회장은 이제 전국 20여 개 도시에 1000개의 점포를 거느린 거대 프랜차이징 기업의 오너로 성장했다. 매출액은 연간 1억 위안 이상으로 불어났고 중국 요식업계에서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큰 성공을 이룬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별난 아이디어와 기발한 마케팅,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던지는 노력이 이뤄낸 결과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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